Tasting Note

화이트데이 전야

지상헌 2006. 3. 16. 13:47

화이트데이에 지방출장을 가야해서 전날 집사람과 조촐하게 한 잔했다.

 

화이트 쵸코렛으로 선물을 해야 한다지만 몸 생각해서

레이블이 하얀 와인 중에서 집사람이 좋아하는 '볼래? 안볼래?'로 골랐다. 

아직도 내 새 사진기와 친해 지지 못했다.

조명상태에 따른 감도 조절에 익숙하지 못하다.

 

르로아의 로고가 맘에 든다.

현대적이기도 하지만 무게 있는 전통도 느껴진다.

 

문장도 기가 막히지.

 

1999년산

 

Volnay-Santenots

 

포일이 돌기는 했지만, 서걱서걱 하니 소리가 나는 것이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포일을 제거하고 보니 누런 곰팡이가 많이 붙어 있더군.

걱정스러운 마음에 곰팡이를 깨끗이 씻어 내고 조심스럽게 콜크를 열었다.

역시... 와인이 넘친 흔적이 분명하다.

 

살며시 테이스팅 해 보았다.

흠~ 아주 심각하지는 않지만 코를 자극하는 지릿내, 약간은 콜키하기도 하고

맛또한 내 선입견 때문인지 약간 콜키하고 미네랄이 따로 노는 듯 짠 느낌, 씹히는 탄닌...

깔끔하지 못한 산미...심하지는 않지만 열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 없는 상황이다.

 

집사람에게 미안하다며 새 병을 따려니, 집사람은 그냥도 좋다고 만류한다.

조금 두고 보기로 하고 안주를 준비한다.

 

항상 즐겨 먹는 파르미지아노 치즈

 

집사람이 후딱 볶아온 소고기 안심

고기 색깔이 이상해서 집사람에게 물어보니, 오랫동안 (언제 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냉동 되어 있던 놈을 요리 했단다. 맛 또한 형편없을 수 밖에 없다.

 

삼청동 'X  XXXX'의 오리요리가 다시 생각나 집사람과 그 이야기를 나눈다.

색깔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우기던 그 집이 아직도 건재한 걸 보면 세상 참 불공평하다.

 

그 수 많은 사기꾼들, 마약사범, 전범들은 오래 잘 살고 있는데도 

정직하고 부지런한 우즈벸 직원 울르크벸군이 사고로 요절한 것을 보아도 그렇고.

 

세상에 태어나서 나쁜 일을 생각 조차 해 보지 않았을 어린이들이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어려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동생 생각이 난다.

 

요리 이야기하다가 너무 비약이 되었네...

 

이것 저것 하느라  한 30분 쯤 지났을텐데,

어라~ 지릿내가 없어졌다.

몇 번 더 스월링을 하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Volnay의 석류향이 올라온다.

몇 분간 더 스월링을 하며 기다렸더니, 제대로다.

 

포장을 새로 뜯은 고급 지갑에서 나는 냄새..

아침 숲을 걷는 듯한 느낌의 아로마,

체리에 석류를 섞은 듯한 과일 향이 진하다.

뒤에 다시 올라오는 가죽? 아닌가 트뤼플향?

 

절제된 화려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멋진 산미와 함께하는 있는듯 없든듯 하면서도 적당한 구조를 만드는 탄닌

밸런스가 좋다고 표현하는 방법 밖에는 없나? 

와인이 정말 나긋나긋하다.

길게 이어지는 멋진 여운 또한 인상적이다.

 

down 되었던 마음이 다시 좋아졌다.

 

집사람과 이 멋진 와인을 함께 해서 행복하다.